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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에는...

마라톤 인생 (2012 춘천마라톤 완주기) 


  25km 지점을 통과하자 갑자기 주자들이 정체되기 시작했고 밀집한 사람들 사이로 푸른색의 스포츠젤(영양식)을 나눠주는 자원봉사자들의 손길이 바삐 움직였다. 나는 5km 전에 이미 초코파이를 먹었기에 배가 고프지는 않았지만 대회에서 제공하는 젤이었기에 한번 먹어보고 싶었다. 땀에 젖은 손을 뻗어 스포츠젤 하나를 집어 들고는 치약을 짜듯 젤을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상큼한 과일향의 진득한 액체가 혓바닥을 타고 넘어갔다. 지난 훈련에서 먹었을 때와는 달리 한결 수월했다. 무중력 상태에서 기능식을 먹는 우주인의 기분이랄까. 뭔가 특별한 일을 한다는 우월감에 가슴 뿌듯했다.


  사실 나에게는 달리기 자체가 특별한 이벤트였다. 막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젊은 날에는 세상의 술이 다 나의 것인 양 지칠 줄 모르고 마셔댔었다. 1차, 2차, 3차, 그리고 국밥집에서 마무리 찍고. 그러다보니 내 허리를 둘러싼 살은 무럭무럭 자라났고 체중은 덩달아 불어나기 시작했다. 거기다 무턱대고 피워대던 담배도 나를 위축되게 만들었다. 몇 번을 끊겠다고 다짐했지만 이삼일에 한번 꼴로 벌어지는 술자리에서 이 약속을 지키기는 쉽지 않았다.
  술과 담배로 인해 몸에는 이상증세들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렇게 살다가는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 것만 같이 불안했다. 이런 걱정들은 스스로 몸집을 키우더니 점점 더 큰 근심이 되어 나를 몰아붙였다.
  "그래,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남은 것은 운동뿐이야"라며 어렵게 결심했지만 운동이라면 담을 쌓고 살아온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인근 운동장을 조심스레 걷고 뛰는 것뿐이었다. 무거워진 몸은 운동장을 한 바퀴 돌기도 벅찼지만 뭔가를 새롭게 시작했다는 느낌에 힘을 낼 수 있었다. 


  27km를 지나자 경사가 조금 급해진 것 같다. 아직 춘천댐이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저 모퉁이를 돌면 수문까지 이어진 오르막길이 있을 것이다. "이번 대회의 제일 난코스라는 부분이 여기구나"하는 생각이 들자 의외로 마음이 가벼워진다. 올 테면 와보라는 식의 체념인지 아직은 견딜만한 체력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크게 걱정되지는 않았다. 어쩌면 풀코스 대회를 처음 참가해보는 이가 갖는 무모함 일수도 있겠지만.
  춘천댐으로 오르는 길은 생각처럼 어렵지 않았다. 동호회(부산교사마라톤)에서 진행했던 산악훈련으로 오르막길에 대한 두려움이 많이 없어진데다 "걷지만 말자"라며 천천히 옮긴 발걸음도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특히 한 쌍의 부부 주자를 보며 힘을 낼 수 있었다. 반보 앞서가던 남편은 마라톤 경험이 적어 보이는 아내를 위해 끊임없이 응원을 하고 있었는데 오르막이 시작되면서 부터는 아예 아내의 등을 살며시 밀어주며 힘을 북돋아줬었다. 이들의 사랑은 나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춘천댐을 넘어설 때까지 계속되었고 춘천을 물들였던 단풍들보다 더 아름다웠다.  


  나 역시도 달리기를 통해 사랑을 찾은 경우다. 달리기에 조금씩 재미를 붙여가던 2005년, 2년 전에 가입해 놓고 곁눈질만 하던 동호회에 처음으로 나갔었다. 산책 수준의 달리기 실력으로 동호회에 나간다는 것도 그렇고 불안정한 직장으로 인해 남들 앞에 나서기도 부담스러워 몇 번을 망설였지만 좀 더 꾸준하게 운동을 해야겠다는 다짐으로 오프라인 훈련에 나서게 되었다.
  그곳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하지만 운동장에서 그녀를 처음 안 것은 아니었다. 이미 동호회에서 활동하고 있던 그녀는 내가 올린 가입인사의 이름 석 자를 통해 내 홈페이지와 블로그를 찾아와 환영의 글을 남겼던 것. 비록 안면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나에 대한 호감을 느끼게 해주는 그녀의 글이었기에 첫 모임에서도 쉽게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곱슬곱슬한 파마머리와 검은 안경은 누가 보더라도 선생님이라는 직업을 알 수 있을 만큼 야무져 보였다.
  "안녕하세요. OO씨?"라며 건넨 첫마디 말에 우리 사이를 연결하게 될 인연을 직감했는지도 모르겠다. 흐르는 땀을 귀찮아하지 않는 그녀의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다. 우리는 달리기 훈련을 통해 서로를 알아갔고 대회 출전을 통해 사랑을 키워 나갔다. 그리고 일 년 뒤, 동호회 회원님들의 축하 속에 결혼식을 올렸다.


  30km, 왼손 약지에 끼워진 결혼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이번 대회의 최대 고비라고 할 수 있는 춘천댐을 지났다. 다리는 점점 뻣뻣해져 오고 정오의 햇살은 뜨거웠지만 나는 여전히 달리고 있었다. 작년(2011년) 경주마라톤의 실패에 비하면 많이 좋아진 것. 그 때는 25km 이후의 급격한 체력저하로 코스를 가로질러 걸어왔었는데 이번에는 30km가 가까워졌음에도 걷지 않고 뛰고 있으니 말이다. 마치 기대하지 않던 응모권이 걸렸을 때의 기분처럼 지금까지의 체력을 덤으로 받은 느낌이었다. 확실히 동호회를 쫓아다니며 백양산과 성지곡 수원지, 해운대 고갯길을 달린 것이 많이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왠지 잘 풀릴 것 같은 기대감이 마음을 가볍게 했다.


  아내가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도 이렇게 가벼웠지 싶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는지 아내는 몇 번을 테스트한 후에야 임신 사실을 이야기했다. 어느 정도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기다리던 상황이라 세간에서 이야기하는 식의 격정적인 감동에 휩싸였던 것은 아니었지만 또 다른 나의 분신이 생긴다고 생각하니 적잖이 흥분되었다. 우리는 괜한 걱정이나 섣부른 조급함보다는 현재의 우리모습을 되돌아보고 작은 것부터 바꿔나갔다. 아내는 마음을 편하게 가지며 즐거운 일만 생각했고 나는 집안의 집안일에 더 많은 신경을 쏟았다.
  그러나 10개월이라는 시간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준비하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던가. 임신 후에도 계속 학교로 출근했던 아내는 퇴근 후에는 완전히 녹초가 되어버렸고 나 역시도 코앞으로 다가온 기능대회 준비로 정신이 없었다. 우리는 서로를 탓하며 상대에게 일을 미루기도 하고 괜한 고집을 세우며 얼굴을 붉히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경험할 수 없는 소중한 순간이었기에 조금씩 양보하며 서로를 위로했다. 우리가 즐거워야 태어날 아기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믿음으로 모든 일을 웃으면서 받아들였다. 그렇게 3.4kg의 아기는 건강하게 태어날 수 있었다.


  35km 급수대에서 다시 휴식을 취했다. 하지만 30km 이후부터 점점 무거워지기 시작한 다리는 바닥에서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10km 간격으로 몸을 풀어가며 뛰었지만 4시간 넘게 누적된 피로는 뛰어야 한다는 의욕을 무디게 만들었다. 주로에는 걷는 사람들의 수가 눈에 띄게 늘어났고 길 좌우로 스프레이를 뿌리며 마사지를 받거나 쥐 난 다리를 움켜쥐며 고통스러워하는 주자들이 여럿 보였다. 나 역시도 뛰고 걷기를 반복하며 남은 거리를 줄여갔지만 시간이 갈수록 뛰는 시간보다는 걷는 시간이 늘어났다. 1km 간격의 이정표는 갈수록 멀어졌다.
  그렇다고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이제 40여분 뒤면 이 레이스도 끝을 보게 되리라. 다리는 움직이질 않고 남은 거리는 만만치 않았지만 나는 여전히 움직이고 있으니 종국에는 결승선을 통과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완주가 목표였다면 이제는 어떻게 골인하느냐가 더 중요한 과제였다.


  힘든 일이 있을 때 이렇게 나를 시간 속에 내맡기곤 했다. 지금처럼 한다면 결국에는 해낼 것이라는, 조금 늦더라도 언젠가는 같은 위치에 서게 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나를 지켜보는 것이다. '노력'이라는 나의 역할을 다했기에 '시간'이라는 외부적 조건에 다가올 결과를 전이시키는 것이다. 그러면 현실 속의 고통이나 괴로움은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닌 시간의 부산물로 떨어져 나갔다. 나는 이렇게 세상살이의 어려움을 관조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마라톤은 나를 되돌아보는 최고의 시간이었다. 몸이 가볍다고 초반부터 무리해서도 안되고 내리막길이라고 성급히 뛰어가서도 안된다. 틈틈이 물과 간식으로 체력을 보충해야 하며 걷고 싶은 마음 속 유혹과 끊임없이 싸워야 한다. 수많은 경쟁자와 싸우는 것 같지만 가장 큰 경쟁상대는 바로 자기 자신이다. 충분한 연습을 통해 스스로를 믿어야 하고,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정신적 스트레스와 스멀거리며 올라오는 육체적 고통을 견뎌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선택과 노력으로 이루어졌으니 그 결과 또한 온전히 자신의 몫이었다. 주로에서 흘린 수많은 땀방울이 있었기에 어떠한 결과라도 당당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소양2교를 지나자 40km를 알리는 이정표가 보인다. 이제 남은 거리는 2km 남짓. 양 손을 번쩍 들고 멋지게 골인지점을 통과하는 내 모습을 상상하며 느린 속도지만 마지막 힘을 쏟는다. 운동을 처음 시작했을 때의 각오와 아내와 나 사이의 믿음, 첫 아이의 탯줄을 자를 때의 뭉클함을 생각하며 정신을 집중한다. 달리기를 통해 세상을 살아가는 힘을 내어본다. 미지의 세상을 향해 힘차게 달려간다.
  저 모퉁이 뒤에는 오늘의 레이스를 마무리 짓는 결승선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곳은 내 삶의 또 다른 출발선이 되어줄 것이다.

 

 

- 2012/10/28
  2012 춘천마라톤에서 5시간 15분으로 첫 풀코스를 완주했습니다. 이날은 내의 또 다른 생일이었습니다! 
 

마라톤은 나를 돌아보는 최고의 시간 (2012 춘천마라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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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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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29
16:33:53
(*.203.239.204)

이 글로 국민생활체육회와 조선일보가 주관하는 생활체육체험수기 공모전에서 입상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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