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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는...

다시 찾은, 지리산 (경남)


여행지 : 중산리, 지리산, 백무동
여행일 : 2009/02/26
사진첩 : 다시 찾은, 지리산 icon_slr1.gif


정말 오랜만이다. 지리산에 마지막으로 찾은 지가 벌써 3년 전이던가? 20대 시절엔 일 년에 한두 번 이상은 꼭 다녀가곤 했던 ‘성지’같은 곳이었는데 이런저런 핑계로 너무 늦게 찾아온 것은 아닌지 미안스럽다.
물론 그동안 전혀 잊고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삶이 팍팍하게 느껴진다거나 다람쥐 쳇바퀴 같은 일상에 짜증 날 때마다 어김없이 생각나던 곳이 바로 이곳이었으니... 아무튼 직장 등산동호회에서 지리산을 찾는다는 말에 얼마나 기대했는지 모른다.
지리산, 드디어 가는구나!


2월의 마지막 목요일, 한적한 평일을 택해 중산리로 가는 봉고차에 오른다. 아홉 명이나 되는 직장 선배들과 떠나는 길이라 대중교통보다는 차를 한 대 대절해서 다녀오기로 했다.
약간은 흐린 듯한 날씨가 조금은 걱정스러웠지만 지리산에 간다는 사실에 훌훌 털어버릴 수 있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타이어 소리와 창밖으로 스쳐가는 바람소리마저 경쾌한 행진곡처럼 들린다.


천왕봉에서 바라본 남쪽 전경(중산리)


두 시간 정도를 달렸을까, 저기 멀리서 거대한 회색 산줄기가 보이기 시작한다. 주변의 작은 봉우리들 뒤로 숨었다가 잊을만하면 잠깐씩 보여준다. 사랑하는 여인의 애간장 녹이는 숨바꼭질 같다고나 할까.
하지만 그 애잔함은 중산리에 가까워지면서 눈에 띠게 늘기 시작한 모텔에 덥혀 금세 날아가 버린다. 과연, 모텔천국 대한민국의 면모를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순간이다. 주차장 뒤로 숨어버린 번호판처럼 은밀하게 우리 땅을 뒤덮고 있으니...


산행 준비
하지만 중산리에 들어서자 다시금 설레기 시작한다.
“아, 여기가 바로 지리산, 지리산의 시작이구나!”
등산로 초입에서 장비를 정비하고 출발하려는데 법계사 인근의 청소년수련장(순두류)까지 운행하는 버스가 보인다. 중산리는 수십 번을 왔지만 법계사행 순환버스는 처음 본다. 산에 와서 버스를 탄다는 것이 탐탁치가 않았지만 늦은 출발시간(10시)과 오늘 일정(중산리-천왕봉-백무동)을 생각한다면 조금이나마 시간을 줄일 수 있는 버스가 더 효과적이리라.
산이라는 거대한 자연 앞에, 용기를 가장한 어설픈 만용으로 엄청난 대가를 치르는 경우를 종종 본다. ‘이쯤이야’, ‘조금만 더’라고 생각하는 순간이 제일 위험하다. 산도 건강하려고 즐기는 것이니 언제나 안전을 제일로 생각해야겠다.


평탄하던 길은 점차로 경사를 높이며
청소년수련장에 도착한 우리는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한다. 법계사가 지척이라는 생각과는 달리 제법 거리(2.8Km)가 있다.
한발 한발, 그동안 잊고 있었던 내 숨소리에 장단을 맞춰 발걸음을 옮긴다. 평탄하던 길은 점차로 경사를 높이며 우리를 괴롭힌다. 헉헉거리는 숨소리가 산길에 가득 찼다 싶으면 요기와 담소로 발걸음을 충전한다.
진한 땀 냄새 속에 이어진 산길은 사람들과의 또 다른 만남을 주선한다. 직장에서 있었던 일이나 사회속의 이슈들이 하나 둘 풀어지면서 잊고 지냈던 서로간의 친분을 끈끈하게 엮게 된다.


고개를 몇 구비 돌자 로타리대피소가 보인다. 법계사 밑에 있는 조그만 산장으로 초기 모습을 간직한 지리산의 몇 안 되는 산장중의 하나다. 지금은 금지되었지만 90년대 말까지는 여기서도 야영을 많이 했었다. 어둡고 고요하던 중산리의 밤하늘에 무수히 박힌 별들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그 첫 종주 때의 기억은 아직도 여전하다.


로타리대피소에서 허기를 보충한 후 법계사를 지나 천왕봉으로 향한다. 법계사 이후로 한층 급해진 산길이 내 발길을 무겁게 하지만 고도가 높아질수록 등 뒤의 시아도 한결 시원해진다. ‘여기가 지리산이고 내가 이곳에 있다’는 들뜬 생각에 마음만큼은 저만치 앞서 달린다.
그러나, 현실은 잔혹했다. 게으른 일상으로 비대해진 ‘살’들은 발걸음 잡아끌며 놓아주질 않는다. 작심삼일이 될지언정 지금 당장은 운동에 대한 욕구가 마구 샘솟는다. ^^


개선문을 지나자 천왕봉이 지척임을 알리는 천왕샘이 나타난다. 수량도 적은데다 겨울 산행에서는 대부분 얼어있어 그냥 지나치기가 일쑤인데 오늘은 다행히 그 시원한 맛을 느껴볼 수 있었다. 작은 바위틈으로 경쾌하게 흘러내리는 석간수 한 모금은 내의를 적시는 땀을 시원히 닦아준다.
“저기 천왕봉이 보인다. 자, 끝까지 힘내자!”


푸른 하늘에 눈을 매달고 돌계단을 오르다 보면 어느새 천왕봉에 도착한다. 천왕봉(1915m)! 여기가 바로 지리산의 정상, 한반도의 중심이리라. 크게 심호흡을 하늘에 그리며 지리산을 둘러본다.
치열했던 우리 민족의 아픔을 함께 했지만 힘든 내색 없이 당당하게 버티고 선, 화려하지는 않지만 아버지 같은 그 넉넉함과 포근함으로 우리를 감싸 안은, 한참을 떠돌다가도 변함없는 반가움으로 맞이할 것 같은 고향 같은 산, 지리산! 바로 그곳에 섰다.
오래된 친구를 만나는 즐거움이랄까. 천왕봉이라 적힌 표지석이 옛 친구의 문패처럼 반갑기만 하다. 표지석에 옹기종기 모인 사람들마저 한마을의 이웃처럼 정겹다.


천왕봉에서(K산악회)


하지만 옥의 티처럼 마음 한구석에 안타까움도 남았다. 반야봉, 노고단으로 이어진 지리산 종주능선과 발아래 펼쳐진 남도의 수많은 봉우리들 위에 진회색으로 펼쳐진 스모그 띠는 외면할 수 없는 우리의 자화상처럼 보였다. 화려한 물질문명을 위해 아무렇게나 팽개쳐진 자연의 검은 주름살이랄까. 인간의 이기심으로 걷잡을 수없이 훼손되어버린 자연, 마음이 무겁다...


천왕봉 아래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하산길에 나섰다.
탁 트인 시아와 함께 반야봉, 노고단까지 이어진 'S'자형 능선길이 한눈에 들어온다. 여러 농담이 겹겹이 더해진 한 폭의 동양화 같다. 굽이치는 능선과 봉우리가 과연 지리산이구나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통천문을 지나면 고사목지대가 나온다. 벌목꾼의 안일함에 불러온 재앙이라지만 지리산의 매서울 칼바람과 싸워온 앙상한 주검들이 꾀 인상적인 곳이었는데, 이마저도 세월의 풍상에 하나 둘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하산길에
장터목산장을 기점에서 백무동 방향으로 내려선다.
지리산 북쪽을 돌아가는 산길이라 아직 눈이 녹지 않은 곳이 많다. 사각거리는 느낌이 좋긴 하지만 눈이 얼어버린 곳은 꾀나 미끄럽다. 아이젠과 스틱에 의지해 피곤해진 몸을 움직인다.
시간이 지나면서 어둑한 해그늘이 계곡에 깔리기 시작한다. 하산길이 길어질수록 하늘에 드리운 나뭇가지들은 더욱 검어지고 을씨년스러워진다. 그만큼 어깨는 무거워지고 발걸음은 더뎌진다. 끝없이 이어진 돌계단은 서서히 내 무릎을 옥죄어 온다.
언제부턴가 지리산의 등산로가 나무계단이나 철계단, 혹은 돌길로 바뀌기 시작했다. 몰려드는 인파의 씩씩거리는 발길질로부터 등산로를 보호하기 위한 고육지책일 테지만, 점점 인간에 맞춰 자연이 재단되어 간다는 생각에 아쉽기만 하다. 우리가 파놓은 자연의 흉터이기에 산을 찾는 ‘무릎’이라면 기꺼이 감수해야만 하는 계단길...


어둠이 짖어질 무렵, 세 시간여의 기~인 하산을 마치고 백무동에 도착했다. 백무동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어찌나 반갑던지...
지리산이라는 무게감만큼이나 오늘도 ‘한 껀’ 했다는 뿌듯함을 안고 차에 오른다. 하지만 아쉬운 마음에 자꾸만 뒤돌아보게 된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진정시키며 돌아온 길을 올려본다. 해가 저물어 지리산의 형체도 어둠속으로 사그라지고 있었지만 그 존재만은 변함없으리라. 사람이 변하고 세상이 바뀌어도 언제나 그 곳에 있으리라. 모처럼 만난 오래된 친구처럼, 늘 따뜻하게 우리를 맞이해줄 것이다.
언제 다시 올지 기약할 수는 없지만 다음번에는 좀 더 찐하게 데이트하고 싶다. 지리능선을 걸으며 다정하게 속삭이고 싶다.


다음 산행을 기약하며(K산악회 회원들과)

분류 :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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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32
등록일 :
2011.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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