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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는...

지리산, 빗속의 종주  


여행지 : 화엄사, 노고단(대피소), 삼도봉, 형제봉, 벽소령, 칠선봉, 세석(대피소), 촛대봉, 천왕봉, 중산리
여행일 : 2015/08/10 ~ 12
사진첩 : 지리산, 빗속의 종주 icon_slr1.gif

 


  # 프롤로그

  지인과의 술자리에서 지리산을 다시 한 번 가보고 싶다는 말을 꺼냈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함께 가자는 의견이 모아지고 급하게 날짜를 잡아 추진하게 되었다. 코스는 화엄사에서 올라 중산리로 내려오는 2박3일의 종주코스(37km)로..

  그러고 보니 6년만의 지리산행이자, 12년만의 지리산 종주인 샘인데 한창 지리산에 빠져 있을 때는 책방에 가면 무조건 산에 관한, 지리산 관련 책을 먼저 뒤적거렸고, 일 년에 두 번 이상은 지리산에 올랐었다. 오죽했으면 결혼 프러포즈도 지리산 천왕봉에서 했으니 말이다. 일출을 바라보며, 저 태양처럼 환하게 살아보자고... (지리산 삼신할매의 정기를 받아서일까, 아들 셋과 함께 알콩달콩 잘 살고 있다.)



  # 1. 화엄사 - 노고단

  화엄사를 둘러보고 노고단으로 향한다. 화창하다 못해 무더운 여름날 산을 오른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 몸의 땀샘으로부터 쉴 새 없이 육수가 쏟아진다. 수건은 물론 티셔츠에 바지, 심지어 속옷까지 땀으로 축축하다. 흘린 땀이 많아질수록 배낭을 짊어진 어깨는 무거워졌고, 종아리와 허벅지에 더 많은 힘이 들어갔다.

  한 시간쯤 올랐을까, 더위에 지친 우리는 계곡에서 조금 쉬어가기로 했다. 어디가 적당한 장소가 없나 살펴보던 차에 "야영금지"라 적힌 현수막이 보였다. 화엄사골을 오르면서 이런 현수막이 걸려있는 곳이 오히려 계곡의 시원함을 만끽하기에는 명당이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아버렸기에, '금지'가 오히려 '환영'이라 보이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적당한 크기의 탕(?)이 땀에 절은 우리를 맞이해주었다. 

  꼼꼼해진 발을 계곡물에 담그자 차가운 청량감이 척추를 타고 온 몸으로 퍼졌다. 굳었던 뼈마디가 풀리면서 온 몸이 서늘해지는 느낌이란... 시원한 맥주를 한 사발 들이키니 여기가 지상낙원인 듯 움직이기 싫었다. 지리산이고 뭐고 여기서 푹~ 쉬고 가는 것도 한여름의 좋은 피서법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행복은 여기서 끝! 고도가 높아질수록, 노고단과 가까워질수록 경사 또한 급해졌다. 우리를 지상낙원으로 안내했던 계곡물도 보이질 않고 배낭은 점점 더 무거워졌다. 구부러진 허리를 지탱하며 한발씩 걸음을 옮겨보지만 끝없이 이어진 돌계단은 하늘까지 올라갈 것처럼 보였다. 저만치 숲길 사이로 푸른 하늘이 보이는가 싶다가도 또 다른 길이 이어지며 우리를 괴롭혔다. 이렇게 세 시간을 헉헉거리고 올랐을 즈음에야 겨우 노고단에 닿을 수 있었다.


화엄사    화엄사 계곡에서


  # 2. 노고단 - 벽소령 - 세석
  수면 위로 고개를 빠끔히 내민 체 쉬고 있는 악어의 무리 같다. 아침이라 더욱 낮게 깔린 구름 위로 드러난 굴곡진 산줄기의 모습은 고요하기만 했다. 노고단 고개의 관리공단 직원분이 저기 보이는 봉우리가 광주의 무등산(국립공원)이고 전남의 조계산(도립공원)이라고 알려줬다. 정말이지 첩첩산중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노고단 고개에서 만난 우리산하의 풍광이 먼 길을 떠나야 하는 우리들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준다.

  고개를 지나 삼도봉에 이르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멀리 보이는 천왕봉도 점점 구름 속으로 사라진다. 산에서 비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최근의 화창하던 날씨에 비하면 좀 억울하기도 했다. "왜 하필 오늘이지? 오늘을 세석대피소까지 20km 가까이 걸어야 하는데..."

  거기다 오른쪽 등산화의 밑창마저 떨어져버렸다. 어제 노고단을 오를 때 왼쪽이 떨어지더니 오늘 기어이 나머지도 같은 꼴이 되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아직 체중을 지탱해줄 스펀지 층이 조금은 붙어 있다는 점. "이런 고무바닥을 신고 지리산을 종주할 수 있을까? 등산로의 자갈과 바위를 내 발바닥이 버텨 줄까?"

  비를 쫄딱 맞은 우리는 점심시간 무렵에 연하천대피소에 도착했지만 산장이 공사 중인데다 점심을 먹으려는 등산객으로 붐벼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아침을 늦게 먹은 것도 있었고 아직은 걸을만했기에 3.6km 떨어진
벽소령대피소까지 가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하지만 세속의 길과는 달리 산봉우리를 넘는 바위길이라 생각처럼 만만치가 않았다. 오르막 내리막을 반복할 때마다 주린 배에서는 "배고파, 밥 줘~"라 아우성쳤다.

  우람한 형제봉을 지나 벽소령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대피소 한편에 마련된 입식 취사장이서 햇반을 데우고 라면을 끓이고, 집에서 준비한 조림으로 만찬을 즐겼다. 그리고 소주까지... 와인잔을 기울이는 이국의 파-뤼가 부럽지 않았다.


  벽소령을 지나 세석에 가까워질수록 길이 더 험해진 느낌이다. 바위와 로프를 타고 오르내리는 능선길은 오전부터 내린 비로 미끄러웠고 주위를 뿌옇게 둘러싼 비구름은 귀곡산장을 찾으러가는 영화 속 장면처럼 으스스했다. 어쩌면 우리가 더 피곤해진 탓이 크겠지만. 

  그런데 이런 악천후의 지리산 종주길을 오르는 어린 친구들도 제법 보였다. 어제부터 함께 화엄사를 오르며 종주를 시작한 가족인데 당당하게 산을 오르는 초딩 2년차의 모습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오늘도 역시 비 속을 뚫고 산을 오르는 모습이 씩씩해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누적된 피로와 비 때문인지 차츰 늦어지기 시작하는 모습이 걱정스럽기도 했다. "우리집 아이들은 언제쯤 지리산에 오려나?"

  저녁 6시가 다 되어서야 세석대피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 꼬락서니가 말이 아니었다. 계속되는 산행에 온 몸이 욱신거리는데다 땀과 함께 비에 홀딱 졌어버린 옷은 체온을 계속 빼앗았다. 그리고 빗물과 박피(?)로 아쿠아슈즈가 되어버린 등산화로 인해 발바닥은 퉁퉁 부어있었다. "배낭 안의 옷은 괜찮을라나? 감기라도 걸리는 게 아닌지 모르겠네. 내일도 비가 계속된다는데..."


형제봉, 칠선봉에서



  #3. 세석 - 천왕봉 - 중산리

  아침에 눈을 뜨자 장단지에서 올라온 뻐근함이 온 몸을 찌릿하게 타고 넘는다. 대피소 계단을 내려가기 힘들 정도로 근육은 뭉쳐있었고 물에 불어터진 찐빵처럼 변해버린 발바닥은 욱신거렸다. 어제에 비해 거리는 조금 줄었다지만 1915m, 천왕봉을 올라야하고 급경사의 중산리 길도 내려와야 하는데 몸이 감당을 해 낼지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 없지 않은가. 몸은 걸음을 내딛는 순간 적응할 테고, 우리를 괴롭히던 산길도 언젠가는 끝날 테니... "이 또한 지나가리라."


  벌목꾼의 방화와 관리소홀로 엉망이 되어버렸지만 이제는 자연의 모습을 거의 회복한 세석평전, 자연의 놀라운 치유력에 놀라며 촛대봉까지 내쳐 올랐다. 1703m라는 이정표를 보지 않더라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기에 어제보다는 한결 수월했다. 이렇게 몸은, 우리는 지리산에 적응해고 있었다. 

  장터목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천왕봉을 향해 마지막 스퍼트를 했다. 눈앞에 버티고 섰어야 할 천왕봉이 비구름에 가려 보이지는 않았지만 6년 전의 산행이나 12년 전의 종주에서도 봐왔듯이 여전히 그곳에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마음속에서나마 그 존재를 확신할 수 있었다. 제석봉을 돌고 통천문을 지나 30km를 걸어 도착한, 이렇게 오른 천왕봉(1915m).

  비바람과 눈보라에 씻겨 바위살을 그대로 드러낸 천왕봉은 부드러운 능선길의 지리산과는 달리 상당히 강인해 보였다. 앞뒤를 분간하기 힘든 비구름에 쌓여 있지만 그 위세만큼은 어디를 견주어도 당당했다. 주변 상황이야 어떻든 자신만의 길을 가겠다는 장인의 걸음처럼 말이다. 어쩌면 지리산을 계속 찾는 이유 중의 하나는 지리산의 능선과 계곡이 갖는 포근함과 비교되는 천왕봉의 꼿꼿함이 부러워서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일에는 마무리가 중요한 법. 제라도 올리듯 소주 한 잔씩을 나눠 마신 후 저마다의 감회를 되새기며 하산을 준비했다. 정상을 오를 때에 비해 상대적으로 긴장감이 덜할 수밖에 없기에 산은 내려올 때가 더 조심해야 한다. 흔들거리는 다리를 진정시키며 한걸음씩 빗속을 내려간다. 우리가 있던 세상 속으로... 


천왕봉에서    지리산 천왕봉(1915m)


  #4. 에필로그

  산은 언제나 그곳에 있다. 지리산을 처음 찾은 사람이나 수십 번씩 찾은 사람에게나 언제나 그렇게, 그 자리에 존재한다. 모두를 받아들이며 아무런 불평도 없이 항상 우리 남녘땅 중심을 떠받치고 있다.

  어제는 내가 지리산을 몇 번이나 올랐고 종주했는지 여행기, 일기장, 사진첩을 뒤져 확인해봤다. 기록과 기억의 한계로 정확한 횟수는 알 수 없지만 내가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던 30여회보다는 조금 적은 것 같았다. 얼마나 많이 올랐는가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기억이 확대되고 부풀어진 데에는 지리산이 갖고 있는 엄마품 같은 친근함이 한 몫을 한 것 같다.

  빗속 종주길이었지만 넉넉함과 끈끈함으로 우리를 맞이해준 지리산. 지리산은 언제나 그곳에 있었다.


칼바위에서

분류 :
자연
조회 수 :
498
등록일 :
2015.08.15
17:40:57 (*.113.24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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