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는...
실크로드, 사막을 가르다 (2/6, 실크로드의 관문, 둔황)
우리는 곧 둔황에 도착한다. 하지만 밤새 달려온 기차는 여전히 사막 위를 달리고 있다. 끝도 없이 펼쳐진 사막, 간간이 들어선 전신주만이 이곳이 인간의 영역임을 말해준다. 여기에 비하면 인간은 얼마나 미미한 존재였던가. 저 넓은 땅덩어리의 작은 모래알에 비할 존재지만 스스로의 욕망에 갇혀 다른 것을 보지 못했다. 우리는 손아귀에 쥔 작은 욕심을 놓아버리지 못한 체 대양에 허우적거리는 조난자가 아닌가 싶었다. 기차는 계속 허허벌판을 헤엄쳐 나갔다. 불법을 찾아 나선 현장법사는 물론 비단을 실은 수많은 무역상이 이 길을 지나 서역으로 갔으리라. 우리를 실은 기차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가득 실은 체 둔황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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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관 근처의 식당에서 둔황이라는 이름의 백주와 양고기, 낙타고기, 닭고기로 만찬을 즐기고 양관과 옥문관(40元)을 차례로 둘러본다. 양관과 옥문관은 실크로드로 이어지는 둔황의 서쪽관문이자 군사기지 역할을 하던 중요한 관문이었는데 지금은 다 허물어져 그 흔적을 찾기 힘들다. 다만 양관의 경우 2003년에 대대적은 공사를 통해 복원해 놓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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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합실에서 안내영상을 살펴보며 휴식을 취한 후 셔틀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마귀성(마귀성은 위구르 말로 ‘야단’이란다)를 향해 미끄러지듯 흘러간다. 다른 사막과는 달리 검은 자갈들이 깨알같이 늘어서 있어 마치 검푸른 바다를 보는 것처럼 이색적이었다. 그 위에 솟은 기암 역시 다도해에 점점이 박혀있는 섬들처럼 아기자기해 보였다. 아니 항공모함은 물론 초계함, 순양함, 구축함, 잠수함 등 수십 척으로 이루어진 항공모함함대를 보는 것처럼 위풍당당했다. 하지만 예리한 송곳으로 좌우 난도질당한 것처럼 층이 져있는 기암들의 모습은 영화 <혹성탈출>에서 봤던 멸망한 지구의 마지막 모습처럼 을씨년스럽기도 했다. 저 굴곡과 상처 하나마다에는 우리가 모르는 자연의 힘과 조화가 어우러져 있으리라. 층층이 쌓인 모래층 어디에는 번성했던 실크로드의 발자국이나 전란에 휩싸인 중앙아시아의 눈물, 모래사막에서 생과 사의 열정을 쏟아 부었을 수많은 이들의 땀방울이 녹아 있을지 모를 일이다. 왜 이런 지형들을 마귀성이라 부르는지 알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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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인근 야시장에 들러 양꼬지로 요기를 했다. 후덥지근한 날씨였지만 8시간에 이르는 왕복 코스를 무사히 다녀왔다는 안도감과 시원한 맥주는 오늘의 피로를 풀어주기에 충분했다. 다음날 아침, 투르판으로 가는 기차가 밤 11시 기차라 오늘 일정도 그만큼 여유롭게 시작할 수 있었다. 호텔(둔황산장)에서 아침을 챙겨먹고 느긋하게 쉰 다음 명사산으로 향했다. 명사산은 둔황에 남쪽에 자리 잡은 거대한 사구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모래사막을 경험할 수 있는 데다 월아천이라는 마르지 않는 샘이 함께 있어 더욱 유명한 곳이다. 우리는 한낮의 태양과 사막의 열기를 대비해 썬크림과 모자, 장화(뜨거운 모래에 대비한 헝겊장화로 입구에서 대여해준다) 등으로 철저히 중무장했다.
우리는 먼저 월아천부터 찾기로 했다. 나무와 숲, 꽃들로 잘 정비된 화단을 끼로 조금 걷자 사막과 대비되는 초록신록으로 둘러쌓인 초승달 모양의 조그마한 연못이 보인다. 수천 년 동안 이렇게 큰 모래산 사이에 존재했어도 한 번도 말라버린 적이 없다는 월아천이지만 최근에는 수량이 줄어 인근 호수에서 물을 끌어올 수밖에 없다는 월아천... 하지만 밤하늘의 달빛이 환생하듯 그 기품만큼은 여전히 우아했다. 반달 모양의 안쪽에는 팔각정과 부속건물이 들어서 있어 그 운치를 더했다. 그 옛날 이곳에선 차 한 잔과 함께 삼삼오오 둘러앉아 실크로드의 어려움을 토로했으리라.
큼지막이 솟은 사구 위에 내려선 우리는 직접 모래산을 올라본다. 비단결같은 모래는 발을 내딛는 족족 발목까지 집어삼켜버린다. 발을 바꿔보지만 무게중심을 잡을 세도 없이 다시 미끄러져버린다. 눈앞에 보이는 거대한 모래더미는 쉴 새 없이 흘러내리며 우리를 괴롭힌다. 급기야 간간이 부는 매서운 모래바람이 언덕 정상을 향한 걸음을 무겁게 했다. 얼마 되지 않는 사면이었지만 몇 배의 노력과 시간을 들이고 나서야 언덕 위에 오를 수 있었다. 순간 엄마의 젖가슴처럼 부드럽게 솟아있는 모래산이 첩첩이 보였다. 따뜻하고 보드라운 모래의 촉감은 고향의 느낌처럼 포근했고 둥글게 이어진 산세는 엄마와 아기를 이어주는 탯줄 같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저승사자가 인도하는 이승에서의 마지막 길처럼 쓸쓸하게도 보였다. 사막에 선 우리는 모두 모래와 같은 한 점의 티끌이었다. 나 역시도 결국에는 이 모래로 돌아갈 것이 아니던가. 바람 속에 흔적 없이 묻혀버릴 삶이거늘 무엇이 그리 안타깝고 서글펐던지... 푸른 하늘에 깔린 잔잔한 사막은 오늘을 되돌아보는 거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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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근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우리는 막고굴로 향했다. 명사산 기슭에 개인적인 바람과 종교적 염원에 의해 만들어진 수백 개의 굴을 통칭해 막고굴(160元)이라 하는데, 앞서 말했듯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대했던 곳이다. 비록 오랜 세월에 걸친 약탈과 훼손이 심하다고는 하지만 그 존재감 하나만으로도 둔황과 실크로드를 대변하는 것 같았다. 원래는 가이드를 대동하고 들어가야 했지만 우리는 중국 여행팀에 섞여 슬쩍 입장했다. 328, 329, 334, 16, 17, 55, 61, 62, 63, 96, 103, 104, 105, 130, 148, 158, 172, 173. 무슨 난수표처럼 보이는 이 숫자들이 우리가 둘러봤던 굴의 번호이다. 500개 남짓의 굴 중에서 일반에게 공개된 것은 극소수에 불과했고 보존상태가 좋은 다른 굴을 보려면 상당한 을 더 내야 한단다. 우리는 자물쇠로 채워진 비공개 굴들을 지나, 가이드별로 이동하는 관광객들을 추월하며 빠르게 여러 굴을 둘러봤다.
![]() ![]() ![]() 또한 96굴도 인상적이었다. 하나로 틔운 6~7층 높이의 동굴에 안치된 커다란 북대불(北大佛, 34.5m, 둔황의 북쪽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은 이곳 막고굴에서 제일 큰 불상으로 그 발밑에 선 우리를 한없이 작고 외소하게 만들었다. 마치 비밀 격납고에서 출격을 기다리고 있는 로보트태권V 같이 보는 이를 압도했다. 그보다는 조금 작지만 130굴의 남대불(26m)의 온화함이나 열반에 든 부처를 표현한 158굴의 와불도 기억에 남는다.
![]() 사실 여행 당시에는 각 굴마다 간직되어 있는 의미나 가치를 진지하게 느낄 수 없었다. 여행에 앞서 몇 권의 책으로 각 굴의 내력을 살펴보기는 했지만 익숙하지 못한 중국 고대사와 텍스트로 접하는 견문의 한계 때문인지 실제 여행에서는 각 굴의 개별적인 특징을 구별해낼 수 없었다. 다행히 한국어 가이드를 조금 따라다니며 도강한 덕택에 몇 개의 굴이나마 그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저 외형만을 흘겨보며 여기저기서 읽은 정리되지 못한 내용들을 끼워 맞출 뿐이었다. 하지만 여행 중의 이런 부족함도 여행 후에 여행기를 작성해보거나 블로그에 올려봄으로써 어느 정도는 보상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여행 중에 남겼던 메모나 사진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떠올려보고 가이드북과 인터넷을 통해 미심적은 부분을 찾아 복기함으로써 빡빡한 일정 중의 놓쳐버렸던 세세하고 깊은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또 한 번의 여행기회이 주어지는 샘이다. 그것도 공짜로! 비록 몸은 실크로드에서 돌아왔지만 내 눈과 마음은 여전히 실크로드를 여행하는 샘이니 이보다 더 멋진 일이 어디 있을까. 다음 목적지인 투루판으로 이동하기 위해 하미 역(옛 둔황 역)으로 이동했다. 택시로 세 시간여를 달리자 검은 광물질을 실은 차들이 드문드문 보이더니 시커멓게 채색된 도로와 집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마치 태백의 옛 모습이 이러했으리라.
하나가 좋으면 하나는 나쁘게 마련이고, 모든 것이 좋아 보이지만 결정적인 단점이 있게 마련인 인간사의 모습과 비슷한 것 같다. 그러니 많이 가진 남의 것을 부러워하기 보다는 자신의 것에 만족하고 내실을 키워나가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우리는 하미의 명물인 하미과를 준비해 투루판 행 야간기차(252元)에 올랐다. 흔들거리는 기차에서의 두 번째 밤. 기차의 덜컹거림이 자장가소리처럼 편안하게 들린다. 기차로 떠나는 꿈나라 여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