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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에는...

똥 없는 세상이 열리다


몇 년 전에 블루베리색의 영국산 파카 조터(Perker jotter) 볼펜을 선물로 받아 사용한 적이 있었다. 클래식하면서도 군더더기 없는 심플한 모양이 마음에 들었고 무엇보다 부드러운 필기감이 인상적이었는데 볼펜심을 넣고 뺄 때 나는 딸각거리는 소리까지도 음악처럼 들렸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를 사로잡은 가장 큰 매력은 ‘똥’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볼펜 똥으로 흔히 불리는 잉크덩어리가 전혀 보이질 않았다. 글을 쓸 때면 몇 글자마다 굵고 흉측하게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골칫덩어리가 이 볼펜에선 아무런 문제도 되질 않았다. 긴 선을 그을 때도 선의 두께는 언제나 미끈하고 일정했다.
"이야, 드디어 나에게도 똥 없는 세상이 열리는구나!"
이 볼펜은 인간의 기술로 만든 가장 뛰어난 물건인 것 같았다. 나는 조터 예찬론자가 되어 친구며 직장 선후배에게 그 우수성을 널리 보급하는 한편 인터넷으로 몇 자루를 더 구입해 선물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나의 분신 같았던 조터와의 동거가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일 년 가까이 나의 왼쪽가슴에 자랑스럽게 꽂혀있던 조터가 실수로 와이셔츠와 함께 세탁기에 들어가고 말았는데 검은 잉크를 가득 머금은 체 뜨거운 물과 세제 속에 몇 시간을 뒹굴었는지 모르겠다. 다행히 잉크가 물에 많이 번지지 않아 함께 넣었던 빨래가 눈에 띄게 검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블루베리 색의 내 분신만은 검은 똥을 토하고 흉측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똥이라고는 누질 않는 조터의 몸에는 끈적끈적함만 가득했다. 찐득하게 묻어나는 검은 똥은 지워지지도 않을 뿐더러 오히려 내 손에 진한 흔적만 남기고 있었다.

“아. 조터여, 이렇게 똥에 굴복하는 것이냐! ...”

 

그렇게 그와의 작별을 아쉬워하던 차에, 조터 볼펜 하나가 다시 내 손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놈만큼 애착이 가질 않았다. 나의 첫사랑도 아니려니와 대학홍보용 문구가 새겨진 사은품인지라 온전히 내 것 같지도 않았다. 왠지 모르게 손에서 자꾸 미끄러지는데 아니나 다를까 두세 달을 못 넘기고 잃어버리고 말았다. 물론 분실에 대한 애절함도 전보다는 훨씬 덜했다.

하지만 나에게 똥 없는 멋진 신세계를 알게 해준 그를 어찌 쉽게 잊을 수 있으랴. 굳은 마음으로 입양을 결심하고 인터넷을 뒤져 이전에 썼던 놈과 같은, 블루베리 색의 조터 볼펜으로 주문했다.
기술의 위대함과 똥 없는 볼펜이라는 경외감을 함께 느꼈던 조터, 물론 내 첫사랑과 같을 수야 없겠지만 이제는 새롭게 정을 붙이고 오래오래 살고 싶다. ‘똥’ 없는 세상에서 마음껏 쓰고 그리고 싶다.

똥 없는 세상이 열리다


- 2009/06/04

  조터(jotter)를 그리며...

조회 수 :
1819
등록일 :
2011.05.18
15:46:00 (*.43.57.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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