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eeism.net
   
책(Book) 여행(Tour) 사진(Photo) 잡문(Memo) 게시판(Board)  
   > 책에는...      > 책 이야기
     
 
 
- 책에는...
- 책 이야기

  [1년에 50권 읽기]
   - 2012년 (30)
   - 2011년 (33)
   - 2010년 (59)

책에는...

7년의 밤


지은이 : 정유정
출판사 : 은행나무 (2011/03/23)
읽은날 : 2012/01/15


7년의 밤  

  책 표지를 넘기자 목차가 보이고 바로 소설이 시작된다. 깔끔하고 정갈해서 좋다. 어떤 책은 책머리에 작가의 말이니 뭐니 해서 사족이 너무 많은데 정유정 님은 오로지 글로서 말하겠다는 식으로 당차 보인다.
  이야기는 7년 전으로 돌아가 세령호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들을 빠른 스케치로 그려놓는다. 500페이지가 넘는 묵직한 책이지만 언제 읽히는가 싶게 빠르게 넘어간다. 속사포처럼 풀어놓는 증언을 교차해서 듣는 느낌이랄까. 정신이 없으면서도 한곳으로 모여드는 사건의 흐름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책에 빠져들게 한다.

 

 

  "반 아이들은 내가 누군지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열두 살짜리 여자아이의 목을 비틀어 살해하고, 여자아이의 아버지를 몽치로 때려죽이고, 자기 아내마저 죽여 강에 내던지고, 댐 수문을 열어 경찰 넷과 한 마을주민 절반을 수장시켜버린 미치광이 살인마의 아들. 그 광란의 밤에 멀쩡하게 살아남은 아이." (p18) 
 
  나(최서원)는 세령호의 재앙을 일으킨 살인마의 아들로 7년이라는 시간을 세간의 눈을 피해 살아왔다. 어떻게 전개된 사건인지도 모른 체 아버지의 직장 부하였던 아저씨(안승환)와 함께 등대마을에서 버텨왔다. 하지만 우연한 기회에 나의 존재와 세령호 사건이 다시 부각되기 시작했고 어느 날 나의 버팀목 같았던 아저씨마저 세령호 사건에 대해 쓴 원고뭉치를 남겨놓고는 갑자기 사라져버린다.
  이야기는 다시 7년 전 세령호로 옮겨지고, 끔찍한 재앙이 있게 된 발단부터 차례로 복기된다. 세령호의 보안팀에 근무하던 아저씨(안승환)와 이제 막 새 보안팀장으로 부임한 아버지(최현수), 세령수목원 원장이자 동네 유지였던 치과의사 오영제. 이 세 명은 세령호 밑에서 주검으로 발견된 오영제의 딸을 두고 서로를 범인으로 의심하며 경계한다.
 
   세 마리의 뱀이 서로의 꼬리를 향해 환형으로 돌고 있는 형상이랄까. 세령호 사건을 놓고 벌이는 미묘한 심리전이 보는 이의 마음을 긴장시켰다. 점점 거대하고 치밀해지는 사건은 개성 강한 등장인물들을 통해 구체화되고 형상화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상당한 제력과 명예까지 갖췄지만 부인과 자녀에게 폭행을 일삼는 오영제. 그는 정신병에 가까운 결벽증과 집착으로 자신은 물론 가족과 이웃까지 공멸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다.
  단순히 소설 속의 존재라고 외면하기에는 그의 존재감이 너무나 컸다. 텔레비전이나 신문에서는 연일 이런 '정신병자'들의 이야기가 쏟아지니 말이다. 이들은 자신의 이기심만으로 이웃들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세상을 불살라버렸다. 숨기고 싶지만 그들 뒤에는 우리사회의 그림자가 늘 함께했었다. 우리는 아직 이들을 예방하고 감당할 수 있는 장치가 미흡하다보니 영화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사이코패스'를 무시할 수 없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새 보안팀장으로 부임한 우리들의 아버지, 최현수. 젊음을 무기로 꿈을 좇았지만 현실은 그리 만만하지가 않았다. 몇 번의 실패와 좌절로 현실에 안주하게 되고 술로서 현실을 도피하게 된다. 소설에서는 술에 취한 체 차를 몰다 오영제의 딸을 치어 죽이고 유기하게 된다.
  사소한 것에 떵떵거리다가도 정작 중요한 일에서는 결단을 못 내리며 벌벌 떨게 되는 우리들의 모습이 겹쳐진다. 선과 악의 갈림길에서 방황하는 그였기에 쉽게 미워할 수 없었다.
 
  또한 아저씨로 불리며 어린 나(최서원)를 보살펴주는 안승환은 위의 두 위인들에 비해 상당히 정제된 모습이다. 이른바 바른생활맨에다 정의맨이랄까... 자신의 글을 통해 세령호의 진실을 나(최서현)에게 전해주지만 마음 속 한편에 자리 잡은 공명심으로 인해 세령호 사건이 확대되는 빌미를 제공했다.
 
  자기 것에 광적으로 집착한 체 공멸을 자처했던 오영제나 어둡고 불행했던 과거에 묻혀 자신을 파멸시킨 최현수, 이들은 가족에게서 시작되거나 물려받은 유년시절의 상처를 돈이나 명예, 술과 섹스, 폭력과 같은 외부적인 것에 의존해 해결하려 했다. 하지만 냉혹한 사회는 그들의 상처를 치유하기에는 너무 삭막했다. 어쩌면 그들의 문제는 우리 사회의 문제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들 마음속에 응어리진 '화'를 다스리는 것은 결국 우리 사회가 함께 풀어야할 문제가 아닐까.

 


  소설책을 덥자 한바탕 광풍이 휘몰아친 느낌이다. 다음날 쑥대밭이 되어버린 거리를 보는 느낌이랄까. 정신을 차려 보지만 생시인지 꿈인지 헛갈리기만 하다. 500여 페이지를 채운 수많은 사건과 복선, 추리는 일순간에 헝클어져버렸다. 그만큼 책에 몰입했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이 모든 것을 창조하고 다듬었을 작가가 범상치 않아 보인다. 세상을 만들듯 나무와 숲, 마을과 도로를 그렸으리라.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과 이들이 엮어가는 사건을 써내려 갔으리라. 정유정 작가의 모습이 마치 새벽안개 뒤편에 희뿌옇게 존재를 드러낸 신령스런 존재처럼 다가온다.
  정신병원 탈출기를 그린 정유정 님의 전작, <내 심장을 쏴라>와 마찬가지로 거침없이 풀어놓는 '썰'이 더 하드하고 파워풀해진 것 같다. 마치 미래의 전쟁을 위해 교도소에서 힘을 길러왔던 사라 코너(린다 해밀턴)의 모습처럼 말이다.  아마도 2011년 최고의 소설이 아닐까 싶다. 치밀한 스토리와 빠른 전개, 극적인 사건과 개성강한 인물들까지. 출판된 이후 각종 순위에서 맨 윗자리를 고수하고 있는데다 영화로도 만들어진다고 하니 이 책의 광풍은 당분간 계속되지 싶다.
 

분류 :
한국
조회 수 :
6081
등록일 :
2012.01.15
23:28:32 (*.182.220.169)
엮인글 :
http://freeismnet.cafe24.com/xe/index.php?document_srl=3579&act=trackback&key=f77
게시글 주소 :
http://freeismnet.cafe24.com/xe/3579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수 추천 수 날짜sort 최근 수정일
39 한국 수난 이대 (외) - 하근찬, 이범선 freeism 7672   2011-05-09 2011-05-09 23:12
수난 이대 (외) 지은이 : 하근찬, 이범선 출판사 : 소담출판사 (2002/10/10) 읽은날 : 2010/07/30 수난 이대 - 하근찬 징용으로 끌려간 탄광에서 한쪽 팔을 잃은 아버지(만도)와 전쟁 중에 역시 한쪽 다리를 잃은 아들(진수)의 ...  
38 한국 A (에이) - 하성란 freeism 9055   2011-05-09 2011-05-09 23:38
A (에이) 지은이 : 하성란 출판사 : 자음과모음 (2010/07/30) 읽은날 : 2010/10/27 <A>는 오대양 사건을 모티브로 쓰였다고 했다. 먼저 광신도들의 집단자살사건으로 기억되어 있던 오대양사건을 검색해 봤다. “1987년 8월 경기...  
37 한국 강남몽 - 황석영 freeism 6970   2011-05-09 2011-05-09 23:39
강남몽 지은이 : 황석영 출판사 : 창비 (2010/06/25) 읽은날 : 2010/11/01 강남의 한 백화점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무너졌다. 500여명이 20초도 안 되는 시간에 흙더미에 묻혀 사망했다. 영화 속 이야기 같은 사건이 서울시 한...  
36 한국 병신과 머저리 - 이청준 freeism 9083   2011-05-09 2011-05-09 23:40
병신과 머저리 지은이 : 이청준 출판사 : 열림원 (2001/12/15) 읽은날 : 2010/12/15 장편소설 12권, 중단편소설 10권, 연작소설 3권 등으로 이루어진 <이청준 문학전집> 중에서 주제별로 정리된 중단편집이다. 여기에 실린 중단편...  
35 한국 덕혜옹주 - 권비영 freeism 7296   2011-05-09 2011-05-09 23:50
덕혜옹주 지은이 : 권비영 출판사 : 다산책방 (2009/12/21) 읽은날 : 2010/12/20 요즘 최고로 뜨고 있는 베스트셀러이면서 표절 문제로 시끄러운 작품이다. 덕혜옹주를 평생 동안 연구해왔다는 혼마 야스코(일본인)의 <덕혜옹주 ...  
34 한국 싱커 - 배미주 freeism 9425   2011-05-09 2011-05-09 23:53
싱커 지은이 : 배미주 출판사 : 창비 (2010/05/15) 읽은날 : 2010/12/30 갑자기 시간이 무한정 남아돌기 시작했다. 간병인으로 환자 옆을 지킨다고는 하지만 특별히 하는 일도 없이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몰려오는 졸음으로 시...  
33 한국 설계자들 - 김언수 freeism 5920   2011-05-11 2012-10-16 23:49
설계자들 지은이 : 김언수 출판사 : 문학동네 (2010/08/15) 읽은날 : 2011/01/03 호젓한 숲을 찾아 자리를 편다. 러시아제 7.62구경 드라구노프를 조립하며 오늘의 목표물을 생각한다. 망원렌즈에 초점을 조정하고 목표물을 확인...  
32 한국 레디메이드 인생 - 채만식 freeism 5624   2011-05-11 2011-05-11 00:13
레디메이드 인생 지은이 : 채만식 편집인 : 한형구 출판사 : 문학과지성사 (2004/12/03) 읽은날 : 2011/01/17 <레디메이드 인생> 1934년을 살아가는 인텔리의 구질구질한 일상이 비루하게 그려진다. 빈곤한 시대에 취직자리를 구하...  
31 한국 허수아비춤 - 조정래 freeism 5355   2011-05-11 2011-05-11 00:17
허수아비춤 지은이 : 조정래 출판사 : 문학의문학 (2010/10/01) 읽은날 : 2011/02/08 "화염병을 앞세우고 가투에 몸 던졌던 그때 군부독재를 물리치는 '정치민주화'만 꿈꾸었던 것이 아니었다. 모든 사람들이 고루 혜택을 누리며 살...  
30 한국 왕을 찾아서 - 성석제 freeism 6033   2011-06-17 2011-06-19 02:01
왕을 찾아서 지은이 : 성석제 출판사 : 문학동네 (2011/02/15) 읽은날 : 2011/06/14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순정>(<도망자 이치도>)에서 이미 봐왔듯 시공을 초월한 독특한 분위기와 끊임없이 터지는 유머로 많은 이의 신뢰...  
29 한국 내 젊은 날의 숲 - 김훈 [1] freeism 5620   2011-09-28 2011-09-28 12:07
내 젊은 날의 숲 지은이 : 김훈 출판사 : 문학동네 (2010/11/02) 읽은날 : 2011/09/27 소설이라기 보다는 숲을 중심으로 써내려간 산문집 같았다. 습기를 가득 머금은 아침 수목원처럼 무겁고 눅눅했다. 솔가지에 매달린 이...  
28 한국 낯익은 세상 - 황석영 freeism 4721   2011-10-12 2011-10-12 11:30
낯익은 세상 지은이 : 황석영 출판사 : 문학동네 (2010/05/19) 읽은날 : 2011/10/11 "도시 사람들은 멀쩡한 음식들을 미처 먹어치우지 못하고 묵히다가, 또는 너무 많이 먹다먹다 질려서 버려대고 있었다. 비닐 속에서 녹아 ...  
27 한국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 박민규 freeism 4630   2011-11-06 2011-11-07 21:42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지은이 : 박민규 출판사 : 예담 (2009/07/20) 읽은날 : 2011/11/05 조르바는 거침이 없고 대담하고 섬세했으며 야성적이었고 원초적이었고 감성적이었으며 사려깊었다. 순박하지만 저돌적이었고 따뜻하...  
» 한국 7년의 밤 - 정유정 freeism 6081   2012-01-15 2012-01-15 23:50
7년의 밤 지은이 : 정유정 출판사 : 은행나무 (2011/03/23) 읽은날 : 2012/01/15 책 표지를 넘기자 목차가 보이고 바로 소설이 시작된다. 깔끔하고 정갈해서 좋다. 어떤 책은 책머리에 작가의 말이니 뭐니 해서 사족이 ...  
25 한국 고래 - 천명관 freeism 6251   2012-02-12 2012-02-12 07:33
고래 지은이 : 천명관 출판사 : 문학동네 (2004/12/24) 읽은날 : 2012/02/11 # 1. 검푸른 바다를 소리없이 유영하는,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깊은 숨을 몰아쉬는 당신은 고래를 본 적이 있나요? 가난과 절망에 찌들어버...  
     
Since 1998. freeism.net
by moon sung 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