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eeism.net
   
책(Book) 여행(Tour) 사진(Photo) 잡문(Memo) 게시판(Board)  
   > 책에는...      > 책 이야기
     
 
 
- 책에는...
- 책 이야기

  [1년에 50권 읽기]
   - 2012년 (30)
   - 2011년 (33)
   - 2010년 (59)

책에는...

처녀귀신


지은이 : 최기숙
출판사 : 문학동네 (2010/06/05)
읽은날 : 2010/07/23


처녀귀신  으스름달밤, 화장실에 가려고 방문을 여는데 창가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바람에 나부끼는 커튼이려니 하고 지나치려는 순간 하얀 물체가 커튼 뒤로 숨는 것이 아니던가. 뭐지? 놀란 마음으로 한발 한발 다가가자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진 커튼. "워이"하는 기합소리와 함께 커튼을 열어젖혔다. 스르륵 밀려나가는 커튼 뒤로 보이는 것은 반쯤 열려진 창문. 휴~ 하는 안도감으로 돌아서는 순간 눈앞에 나타난 허연 물체! 긴 생머리를 늘어뜨린 체 하얀 소복을 입은, 입가에 배인 옅은 미소와 핏자국이 선명한, 텔레비전이나 동화책에서나 보던 봤던 바로 그... 처녀귀신!


 무서움과 공포로 다가왔던 그녀의 이야기는 실제로는 억압된 여성성의 상징이었다.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자신의 슬픔이나 고통을 맘 편히 하소연할 곳 없는 여성들의 선택은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특히나 결혼하지 않은 처녀나 남편을 잃은 미망인의 경우는 더욱 가혹했다. 남성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소품으로서의 가치와 열녀에 대한 사회적 강요, 외부적 위협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없었던 상황으로 인해 그녀는 죽을 수밖에 없었고, 죽어서도 쉽게 원한을 풀지 못했다.
 하지만 구천을 떠도는 그들을 도와준 이가 있었으니 그들은 바로 사대부들이었다.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그녀들을 농락하고 이용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구원을 준 것 역시 그들이었다. 그녀들의 사연을 듣고 가해자를 찾아 처벌함으로써 원한을 풀어준 것까지는 좋았으나 '귀신스토리'를 통해 사대부 남성들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 사회적 우위를 확인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다는 점도 부인하기 힘들다. 글을 통해 알려진 대부분의 귀신이야기가 그들의 손에 의해 쓰였고 읽혀졌기에 당연한 결말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한 맺힌 원혼을 통해 남성중심의 사회를 비판하는 이야기도 존재한다. 하지만 권선징악의 이면에 숨어있는 여성들의 억압은 여전했다. 오직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통해서만 자신의 한과 의지를 표현하고 보상받을 수 있었다. 한마디로 '죽어야 사는 여자'인 것이다.


 "한국인에게 귀신의 이미지가 유독 처녀귀신으로 고착된 것은 미혼 여성에 대한 사회적 억압과 희생의 그림자를 반영한다. 부모의 명에 따라 혼인해야 했던 딸, 전쟁의 폭력 속에서 성적으로 희생당한 여성, 사랑의 자율성을 원천적으로 차단당한 처녀, 재혼 가정에서 소외되었던 전실 딸, 일부일처로 구성된 가족관계망의 바깥에 있었기에 출산과 양육의 권리를 행사할 수 없었던 첩, 남자의 사교 파트너로만 인정되었던 기생 등, 전근대 사회의 제도와 이념 속에서 숨죽인 채 살아야 했던 여성들은 귀신이 되어서야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p173)


 결국 처녀귀신은 남성중심의 사회에 은폐된 슬픔의 역사였다. 단순히 일회성의 흥밋거리로만 넘길 것이 아니라 그 억압의 의미를 찬찬히 생각해봐야 할 요즘이다.
 시간이 흘러 처녀귀신의 출연빈도는 많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그녀들의 한과 설움이 완전히 해결된 것 같지는 않다. 어쩌면 노동자귀신, 빈곤층귀신, 다문화귀신, 장애인귀신, 취업귀신, 청소년귀신 등 더 많은 ‘슬픔’을 대동하고 우리 앞에 나타날지도 모르겠다.

분류 :
인문
조회 수 :
6703
등록일 :
2011.05.09
23:08:39 (*.182.220.169)
엮인글 :
http://freeismnet.cafe24.com/xe/index.php?document_srl=1846&act=trackback&key=192
게시글 주소 :
http://freeismnet.cafe24.com/xe/1846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수sort 추천 수 날짜 최근 수정일
36 인문 인생 수업(Life Lessons) - 엘리자베스 퀴브러 로스(Elisabeth Kübler-Ross), 데이비드 케슬러(David Kessler) freeism 5633   2011-12-05 2020-03-15 15:25
인생 수업(Life Lessons) 지은이 : 엘리자베스 퀴브러 로스(Elisabeth Kübler-Ross), 데이비드 케슬러(David Kessler) 옮긴이 : 류시화 출판사 : 이레(2006/06/06) 읽은날 : 2011/12/04 책을 한마디로 요약하라면 다음처럼 정의...  
35 인문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 김용규 freeism 5610   2012-02-06 2012-02-07 00:10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지은이 : 김용규 출판사 : 웅진 지식하우스 (2006/11/13) 읽은날 : 2012/02/05 선선한 가을날, 카페에서 마시는 카페라떼의 부드러움으로 열세편의 소설을 이야기한다. <파우스트>, <데미안>, <어린왕자...  
34 인문 어린왕자와 장미 - 장성욱 freeism 5608   2011-04-08 2011-04-08 10:58
어린왕자와 장미 지은이 : 장성욱 출판사 : 인간사랑 (1994/04/20) 읽은날 : 1998/10/15 작가가 프랑스 유학 중의 학위 논문<생텍쥐페리, 상징군에서의 무의식의 발현>을 94년 한국에서 출판한 책으로 진지하면서 다각적인 접근 방식...  
33 인문 정직한 관객 - 유홍준 freeism 5442   2011-04-08 2011-04-08 16:42
정직한 관객 지은이 : 유홍준 출판사 : 학고재 (1996/06/10) 읽은날 : 1998/11/29 유홍준 교수님의 시평 모음집이다. "미술평론가로서 나의 글쓰기는 크게 두 방향에서 이루어졌다. 하나는 미술계의 전문인을 향해 쓴 평론이며,...  
32 인문 과학 콘서트 - 정재승 freeism 5205   2011-08-03 2011-08-07 22:19
과학 콘서트 지은이 : 정재승 출판사 : 동아시아 (2003/11/13) 읽은날 : 2011/08/03 물리학과에 다니던 친구가 자신의 전공에 막 취미를 붙이기 시작하면서 늘어놓던 장광설이 기억난다. 그 요지는 모든 학문의 기초가 물리학...  
31 인문 보는 즐거움, 아는 즐거움 - 이광표 freeism 5172   2011-04-25 2011-04-25 06:20
보는 즐거움, 아는 즐거움 지은이 : 이광표 출판사 : 효형출판 (2000/10/07) 읽은날 : 2000/12/28 쉬운 문화! 아는 만큼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다는 문화재에 대해 알기 쉽고 흥미롭게 접근한 책이다. 남대문, 동대문, 반가사...  
30 인문 지식인의 서재 - 한정원 freeism 5055   2011-08-29 2011-08-30 09:52
지식인의 서재 지은이 : 한정원 출판사 : 행성B잎새 (2011/05/18) 읽은날 : 2011/08/29 딱딱한 취재형식의 글도 아니고 책을 읽으라는 식의 논설조의 글도 아니다. 오래된 친구를 방문하듯, 따뜻한 차 한 잔 마시듯 편안하...  
29 인문 안철수의 생각 - 안철수 freeism 4926   2012-10-12 2012-10-12 23:20
안철수의 생각 지은이 : 안철수 엮은이 : 제정임 출판사 : 김영사 (2012/07/19) 읽은날 : 2012/10/12 그의 책은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다. 이번 대선에 출마 여부를 놓고 여기저기서 말들이 많은 상태인데다 그의 생각을 직접...  
28 인문 종교란 무엇인가 - 오강남 freeism 4617   2012-12-03 2012-12-03 21:46
종교란 무엇인가 지은이 : 오강남 출판사 : 김영사 (2012/09/21) 읽은날 : 2012/12/03 집중력은 책장을 넘길수록 흐려졌다. 소설 중심의 책읽기에서 벗어나 조금 심각해지고 싶다는 막연한 치기에서 선택한 종교이야기는 쌀쌀해진 ...  
27 인문 20세기 우리 역사 - 강만길 freeism 4495   2011-04-12 2011-04-19 00:02
20세기 우리 역사 지은이 : 강만길 출판사 : 창작과 비평사 (1999/01/25) 읽은날 : 1999/09/07 우리가 몰랐었던, 알고는 있지만 미쳐 생각하지 못한 우리 역사의 단면들을 서술해 놓았다. 그래서 약간은 전문적이지만 '강의' 형...  
26 인문 장미의 기억 (Me'moires de la Rose) - 콩쉬엘로 드 생텍쥐페리 (Consuelo de Saint-Exupery) freeism 4478   2011-04-21 2011-04-21 10:00
장미의 기억 (Me'moires de la Rose) 지은이 : 콩쉬엘로 드 생텍쥐페리 (Consuelo de Saint-Exupery) 옮긴이 : 김선겸 출판사 : 창해 (2000/06/24) 읽은날 : 2000/10/16 영원한 어린 왕자 생텍쥐페리. 그의 부인(콩쉬엘로 드...  
25 인문 마음의 여행 - 이경숙 freeism 4403   2011-11-18 2011-12-12 21:12
마음의 여행 지은이 : 이경숙 출판사 : 정신세계사 (2007/06/15) 읽은날 : 2011/11/17 "과학으로 풀어 본 삶, 죽음, 영혼"이라는 부재가 붙은 이 책은 우리가 막연하게만 알고 있던 정신적인 부분, 영혼이나 전생, 생명이나...  
24 인문 E=mc2 - 데이비드 보더니스 (David Bodanis) freeism 4230   2011-05-01 2011-05-01 01:44
E=mc2 지은이 : 데이비드 보더니스 (David Bodanis) 옮긴이 : 김민희 출판사 : 생각의 나무 (2001/03/23) 읽은날 : 2005/05/08 1. 과거 텔레비전을 켜자 상대성이론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한창이다. 에너지와 질량, 빛의 속도...  
23 인문 거울부모 - 권수영 freeism 4181   2011-12-12 2011-12-25 23:38
거울부모 지은이 : 권수영 출판사 : 울림사 (2007/12/03) 읽은날 : 2011/12/10 자녀에게 모범이 되는 '거울'같은 부모를 이야기한다. 아이에게 눈높이를 맞추되 부모의 감정을 강요하지 말고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라고 한다...  
22 인문 그리스 로마 신화 - 이윤기 freeism 4168   2011-04-27 2011-04-27 00:27
그리스 로마 신화 지은이 : 이윤기 출판사 : 웅진닷컴 (2000/06/26) 읽은날 : 2001/07/04 역시나, 뛰어난 번역자이자 이야기꾼으로서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 책... 걸쭉한 진국처럼 <그리스 인 조르바>의 전설을 우리에게 전해준...  
     
Since 1998. freeism.net
by moon sung 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