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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는...

한 신경병자의 회상록 (Denkürdigkeiten Eines Nervenkranken)


지은이 : 다니엘 파울 슈레버 (Daniel Paul Schreber)
출판사 : 자음과모음 (2010/06/16)
읽은날 : 2010/08/11


한 신경병자의 회상록  신경병자 슈레버의 회고록이 2/3를 차지하며 금치산 선고에 따른 법의학자의 감정서, 이에 대한 슈레버의 항소이유서, 판결문, 옮긴이 해제로 나머지가 구성되어 있다.


 #1. 회상록


 다니엘 파울 슈레버, 전직 고등법원 판사회의 의장까지 지냈다는 이력을 보면 굉장히 집요하고 분석적인 사람일 것 같았다. 그런 철저함이 신경병의 원인이 되어 그를 미쳐버리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한 신경병자의 '지독한' 정신 속으로 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몇 페이지를 넘기자 슈레버의 막강파워에 여간 낙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글은 글이되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것. 슈레버의 개인적인 경험은 조금 이해되다가도 이를 설명하고 회고하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좀처럼 읽혀지지 않았다. '검증된 영혼들', '신경첨부', '영혼살해', '광선', '일시적으로 급조된 인간들', '세계구체' 등 단어의 의미는 물론 이를 설명하는 내용들을 이해할 수 없으니 전체적인 흐름을 따라갈 수 없었다. 500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 중에 100페이지 남짓 읽은 시점이지만 계속 읽어낼 수 있는 이해력과 인내력이 바닥을 드러냈다. 내 머리가 이상한건지, 슈레버의 머리가 이상한 건지, 글(번역)이 이상한건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이 책을 '보이콧'하다! 할 수만 있다면... 보이콧을 인터넷에 찾아보니 "부당한 행위에 대항하기 위하여 정치 ·경제 ·사회 ·노동 분야에서 조직적 ·집단적으로 벌이는 거부운동"이라 설명되어 있다. 물론 이 책 자체가 부당하다거나 읽기를 강요당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내가 서평단이라는 환경에 놓여 있다 보니 어떻게 해서라도 읽어내야 하는 강박관념일 수도 있고, 나만 이해 못했을 때 오는 '쪽팔림'을 염두해 뒀는지도 모르겠다.
 내 경험에 비춰볼 때 어려운 책이라 하더라도 조금 읽다보면 대략적인 구조는 눈에 들어오기 마련인데 이 책은 몇 줄의 문장도 잘 이해되지 않았다. 설사 이해되는 문구가 있더라도 다음 단락과 도저히 연결할 수 없었다. 뭔가 잡힐 듯 하다가도 이네 삼천포로 빠져버렸다.
 과연 누가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슈레버'라는 멋진 이름 속에 숨겨진 광기를 나의 이해력으로는 판가름하기 힘들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읽으라는 책은 읽으려 하지 않고 보이콧이니 뭐니 하면서 책과는 상관없는 쓸데없는 사설만 늘어놓는 모습이 우습다.
 "슈레버 아저씨, 난 당신 정신의 총체였던 회고록 앞에서 이렇듯 농을 까고 있습니다. 어때요?"


 #2. 법의학 감정서


 슈레버의 회상록 부분을 1/3 정도 읽다가 금치산(가정 법원에서 심신 상실자에게 자기 재산의 관리, 처분을 금지하는 일) 항소심을 위해 의학고문관이자 정신병원 의사인 베버 박사가 작성한 법의학 감정서를 먼저 읽었다. 그의 회상록은 나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이해 불가능의 코드였기에 그의 정신에 대한 의사의 감정서(비록 슈레버에 의해 회고록에 첨부되었지만)는 회상록 전반에 걸친 코드를 해독하게 해주는 설명서 같았다. 드디어 독해의 실마리를 찾은 느낌이었다. 유레카!
 베버의 감정서에는 슈레버의 신경병적인 집착과 과대망상이 어떤 식으로 발전되었으며 어떻게 고착화되었는지 나타내고 있다. 슈레버는 자신과 신을 동일시 해가는 모습을 통해 죽음의 영역까지도 극복해 버린 듯 보였다. 심지어 여성성으로의 변신을 통해 신이 되고자 했다. 하지만 신, 죽음과 같은 집착 대상을 제외하고는 지극히 정상적이었다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의 정신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고등법원 판사회의 의장까지 맞았던 전문가가 스스로의 정신 속에 지나치게 깊게 함몰되어 가는 과정은 일 속에 파묻혀 집요하게 살아가는 현대인의 껍데기를 보는 것처럼 씁쓸했다.


 이 감정서와 함께 슈레버의 항소이유서와 법원의 판결문도 첨부되어 있다. 책 후미는 뭔가 술술 풀릴 기세다. 회상록 부분의 막막함은 법의학 감정서를 거치면서 서스펜서 영화를 보는 것 같은 흥미마져 느끼게 된다.


 #3. 항소이유서, 판결문


 자신에 대한 감정서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한다. 앞의 회고록을 읽으면서 느꼈던 난해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더없이 논리적이고 침착하게, 해박한 법적 지식을 바탕으로 신경병자로 생활했던 지난날을 회고하고 대변한다. 결국 재판을 통해 목적(금치산 선고 철회)을 달성한다.
 "드레스던 지방법원 민사 7부는 원고의 항소에 기초해 1901년 4월 13일의 판결을 변경하여, 1900년 3월 13일 드레스텐 행정법원에서 내린 금치산 선고를 철회한다."


 #4. 옮긴이 해제


 옮긴이(김남시)가 알고 있는 회상록 전후의 이야기를 첨부한다. 이 회상록이 슈레버 가문에 의해 대부분 폐기되었다는 것과 프로이트 등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는 것, 그리고 슈레버 가족에 대해 이야기한다.
 특히 슈레버 아버지(모리츠 슈레버)에 대해 "아이들의 자발적 욕구나 의지를 북돋기보다는 이상적 목표를 위해 그를 제한하고 규제해야 하다는 신념의 소유자"라 말하며, 권총 자살한 그의 형과 마찬가지로 슈레버의 신경병도 성장기에 겪었던 폐쇄적이고 엄격한 가정교육에서 그 원인을 찾기도 했다. 그리고 고등법원 판사회 의장직을 수행하면서 겪었던 정신적 스트레스 역시 그를 무너지게 한 중요한 원인이었으리라.


 또한 번역의 어려움도 이야기한다.
 "그에게 작용하고 있는 증상으로서의 언어가 복잡하게 뒤섞여 있다는 점에서 이 텍스트는 일반적인 문학 텍스트와는 구별된다. (중략)
 슈레버 텍스트의 번역자는 이 텍스트가 가지고 있는 언어적 증상을 그대로 옮김 - 이는 사실 불가능하다 - 으로써 읽을 수 없는 번역문을 만들어 내거나, 아니면 가독성 있는 번역을 위해 텍스트의 언어적 증상들을 임의로 '치유'해야 하는 양자택일에 처한다. (중략)
이 번역은 타협의 산물이다. 슈레버의 증상적 문장을 되도록 그대로 전하려던 처음의 시도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한국어 문장의 끔찍한 비가독성 앞에서 좌절했다. 오랜 고심 끝에 번역문의 가독성을 위해 언어적 징후들을 치유하는 길을 택했다. 긴 문장은 짧게 나누고, 어색한 수동문은 능동으로 바꾸었다."


 사실 그의 회상록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였다. 하지만 회고록에 첨부된 법의학 감정서를 통해서나마 그에게 일어났던 정신적 변화를 감지할 수 있었다.
 신경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라면 <법의학 감정서>나 <옮긴이 해제> 부분을 먼저 읽는 것도 좋은 방법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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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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